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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0. 20世 〉6. <요재공>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용촌공휘동일묘갈명(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龍村公諱東一墓碣銘)
1. 문헌 목록 〉20. 20世 〉8. <부정공>괴헌공휘연근가장(槐軒公諱演根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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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정공>통훈대부의금부도사공휘만근묘갈명(通訓大夫義禁府都事公諱滿根墓碣銘)
通訓大夫義禁府都事公諱滿根墓碣銘 玉川趙君炳寬狀其先大人行夐道踏繭乞隧道之文于不佞按公諱滿根字德仲高麗檢校侍中諱璋其上祖三傳諱元吉與圃冶同德共靖王室玉川君諡忠獻享武夷院生諱瑜文科典農寺副正以忠孝旌建祠謙川孫智崑縣監孝友著世治績見輿地誌及曾孫大承宰泰仁民歌其政龍蛇之難勤王生諱珏訓鍊奉事以孝聞諱重明諱廷仁諱河祥於公爲高曾祖三世考諱永振通政妣淑夫人慶州金龍浩女 憲宗戊申十月十二日生公生而氣字軒昻性度醇謹喜怒不形於色儕流甚器重通政公性素嚴子弟少當意公獨洞屬勤孜自幼至長一事母敢專一時母敢逸又母敢一語直達每反而自責曰爲人子不肖莫我若克盡誠力躬耕漁樵以替甘旨之供與其弟五人友于尤篤兄寒弟飢兄飢飽煖常共之怡怡雍雍人無敢間焉弟或有困債者先意傾産不待再督而少也貧不能學常恨之敎子姪甚篤亦未嘗疾遽彦色諄諄然提命家庭之間恩踰於威常藹如也雖友朋姉弟或有願從師者必極力補助賴以負笈者不尠 高宗壬辰筮仕義禁府都事乙巳元月有疾漸劇顧炳寬曰脩短有命吾何恨但九耋雙親未克終養汝之父子未能成立死不瞑目我雖逝善養我父母與汝母告弟若姪曰安我父母涕垂言零翛然而逝即是年上元日得年五十八葬于順天之住巖面鵲峯下麓尺方峙子坐配淑人陰城朴氏斗鉉女後公二年生孝養舅姑舅姑安之娣姒之間不有表裸宗黨稱之乙卯二月十八日歿墓在龜岡午坐原生一男即炳寬前後娶平澤林昌浩濟州梁顯淳女生一男龍基一女適慶州鄭鍾文嗚呼公之墓木己拱矣之德之行于何考焉而余嘗從知公者聞之公身長而容重心和而氣平至於義理之辨不以威武動其志規矩之遵不以縱橫變其道急遽粗暴之熊未嘗發於喜怒之際惟以養親敎子爲家訓以小學一部爲生命諺繙二局寘座石常目過心會處輒欣然忘寢食盖其踐實之工如此今見其狀亦可以無愧乎爲銘銘曰玉川華閥金吾淸銜躬勤服田志尙接嵒孝友慈睦實殫至誠踐履愈篤小學是監嵂彼高崗鬱蒼松杉疇不式躬君子之坎 통훈대부의금부도사공휘만근묘갈명(通訓大夫義禁府都事公諱滿根墓碣銘) 옥천(玉川) 조병관(趙君炳)이 자기 선대인의 행장을 엮어가지고 먼길을 발이 부르트는 것을 무릅쓰고 나를 찾아와 묘도에 새길 글을 청한다. 살펴보니 공의 휘는 만근(滿根) 자(字)는 덕중(德仲)이다. 고려 검교시중(高麗檢校侍中) 장(璋)이 그의 상조(上祖)이며 三전하여 원길(元吉)은 정포은(鄭圃隱) 길야은(吉冶隱)등과 덕을 같이하여, 왕실을 바르게 하여 옥천군(玉川君) 시(諡) 충헌(忠獻)을, 받았으며 무이원(武夷院)에 배향되었다. 그가 낳은 유(瑜)는 문과(文科)로 전농시 부정(典農寺副正)이 되었으며, 충효(忠孝)로 정려(旌閭)를 받았고 겸천사(謙川祠)를 세워 배향했다. 충헌공(忠獻公)의 손자 지곤(智崑)은 현감(縣監)으로 효우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그의 사적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보인다. 또 증손 대승(大承)은 태인(泰仁) 재(宰)가 되어 백성이 그의 정치를 노래했으며, 임진란(壬辰亂)때 근왕(勤王)했다. 아들 각(珏)은 훈련봉사(訓鍊奉事)인데 효(孝)로 소문이 났다. 중명(重明) 정인(廷仁) 하상(河祥)은 공의 고, 증, 조(高曾祖) 三세이며, 고 영진(永振)은 통정대부(通政大夫)였고, 十월 十二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기골(氣骨)이 장대하고 성격이 순근(醇謹)하여 희노(喜怒)를 얼굴에 나타내지 않으니 동료들 마져 귀중하게 여겼다. 통정공의 성격이 엄하여 자제들이 그 뜻을 맞추는 이가 적었는데 공은 홀로 조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어릴때 부터 어른이 되도록 한일도 망므대로 해본 적이 없고 한때도 안일한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또 말할때 바로 쳐다본 적이 없으면서도, 도리어 자기 자신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이 되어 나같이 어질지 못한 사람도 없다.』 라고 하고 성의를 다하여 몸소 온갖 일을 하여 부모를 봉양하였다. 형제 五인과 우애하여 춥고 배고파하는 형제와 포란(飽煖)을 언제나 같이하여 이이옹옹(怡怡雍雍)하니 남들이 감히 이간을 하지 못했다. 형제가 어쩌다 채무에 시달리면 살림을 덜어서라도 갚아주고 두번다시 재촉하지 않도록 해주었으며 젊어서 집이 가난하여 배우지 못한 것을 한(恨)스럽게 여겨 자질(子姪)을 열심히 가르쳤으며 모진 말과 성난 빛을 짓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가정을 꾸려가니 위엄보다는 은혜가 더하여 언제나 집안이 편안하였다. 그리고 벗의 자제라도 스승을 찾아가 배우려 하는 사람이 있으면 힘껏 보조하여 그에게 힘입은자 적지 않았다. 고종임진(高宗壬辰)에 처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며 을사(乙巳) 一월 병이나서 점점 위독해지자 병관(炳寬)을 불러 말하기를 『길고 짧은 것은 명(命)에 있는 것이니 내가 어찌 한(恨)하겠는가마는 늙으신 부모님을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고 너의 부자가 성립(成立)하지 못한 채 나만 이렇게 죽어가니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내가 비록 죽더라도 우리 부모를 잘 봉양할 것이며 너의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말하여 우리 부모를 편히 모셔!』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끝을 흐리더니 문득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그날이 곧 그해 一월十五일이었고 나이는 五十八세였다. 묘는 순천(順天) 주암면(住嚴面) 까치봉아래 척방(尺方)재 자원(子原)에 있으며 부인은 숙인(淑人) 음성박씨(陰城朴氏) 두현(斗鉉)의 딸로 공보다 二년뒤에 낳았으며 시부모를 효도로 봉양하여 시부모가 편히 여기고 시누이 동서 사이에 사이 없이하니 종당에서 칭송하였다. 을묘(乙卯) 二월 十八일에 세상을 뜨니 묘는 귀강(龜岡) 오원(午原)에 있으며 一남 병관(炳寬)은 평택(平澤) 임창호(林昌浩)의 딸을 취처하여 一남 용기(龍基)를 두었고 딸을 경주(慶州) 정종문(鄭鍾文)에게 출가했다. 아! 공의 무덤에 심은 나무가 이미 아름이 되었으니 공의 덕행을 어디에서 상고한단 말인가? 내 일찌기 공을 아는 이에게 들으니 『공은 신체가 크고 용모가 묵중하며 마음이 화열하고 기질이 평탄하여 의리를 분별하는데 있어서는 남의 위엄과 무력으로 내 뜻을 움직이지 않았고 법칙을 준수할 때는 남의 술수에 자기의 도의를 변하지 않았으며 조급하고 사나운 태도를 희로(喜怒)의 순간에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양친 교자(養親敎子)로 가훈(家訓)을 삼고 소학(小學) 일부(一部)로 생명을 삼아 한글로 두권을 번역하여 자리곁에다 두고 항상 보다가 마음에 통하는 곳을 만나면 기뻐한 나머지 침식(寢食)까지 잊곤 하였으니 그의 공부에 대한 실천(實踐)을 이와같이 하였다.』 하더니 이제 그의 행장을 보니, 그의 명(銘)을 쓰는데 부끄러움이 되지 않겠다. 명(銘)에 쓰기를, 옥천(玉川)의 빛나는 문벌로 금오(金吾)의 관함이 이은 후손, 玉川華閥金吾淸銜 밭같이에 몸 담고 바위곁에 뜻을 길렀네. 躬勤服田志尙接嵒 효, 우, 자, 목(孝友慈睦) 그 속에는 공의 지성 엿보이고, 孝友慈睦實殫至誠 공이 한껏 실천(實踐)한건 소학(小學) 그대로 였네. 踐履愈篤小學是監 높다란 저 산등성이 소나무 푸르르니, 嵂彼高崗鬱蒼松杉 어느누가 몸 굽히지 않으리, 군자의 이 무덤. 疇不式躬君子之坎 해평(海平) 윤용구(尹用求) 〈이판(吏判)해관(海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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